카라이치
책상 위로 나앉은 4월의 봄햇살은 노곤하리만큼 고요하고 온난했다. 누차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넘어보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등을 돌린 채로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빼곡히 적어내리는 교사가 보였으며, 교탁 너머로는 그나마 학급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한다는 학생이 턱을 괴고서 자주 고개를 기웃거리는 채로 졸음을 이기려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교탁을 기준으로 중앙에서 세 번째 자리에 위치한 오소마츠는 결국 점심마저 무시하고서 서너 시간을 책상 위로 엎드려 잠에 들어 있었고, 그 대각선으로 햇볕이 가장 잘 쬐이는 창가 서너 번째 자리로는 카라마츠와 제 자리가 나란히 나열하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한 후로부터 대략 이십 분이 지나자 반대편 자리에 위치한 학생 여러 명이 졸던 자세 그대로 잠에 들었으며, 얼마 안 가 교사의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앞 쪽 자리에 속한 학생들마저 필기하던 채로 꾸벅 졸기 시작했다. 역시 춘곤증은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 사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에게도 찾아온 졸음에 꾸벅 고개마저 떨구며 잠에 들려 할때, 의자너머 살살 떨리던 다리가 점차 멎으며 곧 뒷자리에서 슬며시 손가락으로 자신의 등을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치마츠.”
문득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슬며시 졸던 것을 그치고서 겨우 고개를 돌리자, 눈썹을 실룩거리며 칠판을 응시하는 듯 했던 카라마츠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마저도 살짝씩 비틀거리며 조는 모습이 우스운건지 피식거리던 카라마츠가 대뜸 자신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건드렸다. 무심코 그 행위를 따라하며 입가로 손을 옮기자 길게 늘어지는 타액에 화들짝 놀라 바짝 고개를 세우고서 얼굴을 붉혔다. 그것이 뭐가 그리도 우스운건지 헤픈 웃음을 흘리던 카라마츠가 다시 샤프를 들어 교과서 귀퉁이에 깨작 작은 글자로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잠들지 마.」
투박한 손길과는 다르게 꽤나 정갈한 글씨에 저도 모르게 한참이나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그의 눈을 마주했다. 손아귀에 들린 펜을 빼앗아 그의 글자 바로 밑에 본인은 잔 적이 없다고 꼬박 써내려갔지만, 보이지 않는 척 글자는 바라보지도 않고서 다른 손을 들어올려 흐뜨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던 카라마츠가 다시끔 펜을 가져가고서 글자를 적어내렸다. 「알았으니까 눈곱부터 떼.」 그리고서는 다시 어린 아이를 보는 것마냥 마주하고 있는 것이 억울해 작게 소리를 내어 질책하자 또다시 픽 웃음을 흘리며 알겠다는 듯 그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자극이 되어 더이상 졸지 않겠다고 제 손으로 볼을 꼬집는 자학까지 하면서 다짐을 하였지만 카라마츠에게서 등을 돌린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결국 잠에 들었고, 그 뒤로 종례를 마칠 때까지 기어코 일어나지 못했다. 본인이 겨우 눈을 뜬 것은 방과후, 텅 빈 교실에서 어느새 가방까지 맨 채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카라마츠로 인해 깨어난 것이었으며 그는 마치 웃음이라도 참는 듯 가늘게 목소리를 떨었다. 이제 집에 가야지? 라는 얄궂은 놀림과 더불어.
공부하고는 담을 쌓을 것 같아도 카라마츠는 쵸로마츠의 다음으로 형제들 중에서 제일 가는 상식인이었으며, 쵸로마츠 역시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가끔 굳이 계단을 올라 4층인 그의 반까지 찾아와 질문을 하고서 꼭 무언가를 받아 적고서 내려가고는 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배운 것만큼은 성과가 따라주지 않았기에 때마다 울적해 하였지만 최근에는 나름대로 극복한 듯 했다. 그 이유로 카라마츠는 줄곧 도서실이나 시험 시간에는 굳이 나를 데리고서 시간을 소비했고, 본인은 애초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기에 책을 베고서 눕기만 하여도 꼭 숨이 닿을 것 같은 위치에까지 얼굴을 가까이 하고서 놀래키거나 잠들지 말라는 간지러운 웃음을 귓가 가까이에 흘리고는 했다. 어쨌거나 그는 잠이 든 나를 깨우거나 놀리는 것에 상당한 재미가 들린 것이 분명했다. 결국은 그렇다고 해도 성인이 되어서는 이런 행위는 점차 그쳤으며, 불분명한 이유로 사이가 멀어짐에 따라 이제는 잠이 든 것을 보아도 용케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돌아서고는 했다. 원인은 그가 회사에 입사한 것이 이유였으며 어느 경우에는 장기간 해외로 출장을 가는 일마저 빈번해지고 있었다.
일찍이 회계 쪽으로 돌아선 카라마츠와는 상반으로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본인마저 바빠져 집에 들릴 틈도 없었고, 얼마 전에는 자취방까지 따로 마련하여 가족들과는 별거하고서 홀로 지내기 시작하였다. 가끔씩 형제들이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인적도 드물었으며 날이 갈수록 쌓이는 과제와 아르바이트로 몸이 두 체가 되어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즈음, 해외로 나가있는 줄로만 알았던 카라마츠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였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몇 번을 반복하고 있는 행위임에도 여전히 시차 적응은 되지 않은건지 새벽 세네 시에 대뜸 전화하여 보고싶다고 울먹이는 탓에 겨우 달래며 자지도 못하고서 그 다음 날 아침, 부랴부랴 공항으로 나가 그를 맞이하였다. 못 본 사이 살이 좀 탄 듯한 카라마츠는 자칫하면 어색해질 상황에서도 방긋 웃으며 오고가는 대화가 없는 이 상황을 모면하고 있었다. 딱히 자신도 그에게 건넬 이야기라고는 살이 조금 탔다거나 못본 사이 많이 달라졌다는 진부한 것들 외엔 없었기에 그저 머쓱하게 입꼬리만 비틀어 웃고있던 찰나, 잠자코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던 카라마츠가 대뜸 편의점으로 들어가 양손 가득 캔맥주를 들고서 살살 히죽이고 있었다. 술이나 마실까? 동의도 없이 대뜸 술부터 산 그의 제안이 어이없기 짝이 없었지만 요 몇 달 사이에 음주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나에게는 좋은 제안이었기에 별말없이 승낙하였다.
“어니언 헤밍웨이가 말했지…, 지적인 사람은 때때로 바보들과 어울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술에 취한다.”
“…양파가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시대가 많이 발전했나보군.”
요즘은 페퍼로니도 대화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이제 겨우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는 캔을 쥐고서 비척거리니 어디서 나타난건지 카라마츠의 손이 불쑥 나타난 덕분에 넘어지는 것은 가까스로 방지하였다. 예전에는 분명 나만큼 음주에 약한 녀석이었지만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서 제 옆으로 빈 캔을 쌓아가는 모습이, 못본 사이에 음주량이 꽤나 늘어난 듯 했다. 갈수록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변해가는 시야와 불분명한 사물들, 그리고 물결치듯 작게 일렁이는 카라마츠. 그러니까 내가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했잖아. 새로 캔을 따는 카라마츠에게 빈정거리자 캔따개에 은근히 손가락을 걸치고 있던 카라마츠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어릴 때는 나보다 한참 키도 작았던 주제에 지금은 나보다 좌고마저 우뚝 높은 것을 보니 괜히 성질이 나 카라마츠를 붙잡고 대뜸 일어서 그와 함께 신장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저보다 한뼘 이상이나 더 큰 것을 보고서 덜컥 설움이 차올라 뻘쭘하니 서있는 카라마츠를 밀치고서 주저앉아,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그를 두고 그치지 않는 울음을 한참이나 쏟다 곧 샘 마르듯 금세 그치는 눈물을 닦고서 고개를 들자, 가까스로 웃음을 참은 듯한 카라마츠가 슬며시 다가와 휴지 몇 장을 건네주었다. 괜찮아? 라는 물음과 함께.
“이치마츠는 술만 마시면 약해지니까. 역시 어쩔 수 없,”
“…카라마츠.”
“…아?”
“잘 지냈어?”
생각해보면 카라마츠를 다시 마주한 것은, 자그마치 몇 개월 만이었다. 물론 나조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카라마츠의 입 밖으로 어떻게 지냈냐는 형식적인 질문마저 나오지 않자 그동안이 무색해질만큼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에 역으로 그에게 질문하자 잠시 맥락이 끊겨 당황하는 듯 했던 카라마츠가 결국은 재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었어. 듣고자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대답에 더이상의 질문은 않고서 바닥에 다시 주저앉아, 아직 반이나 남아있는 맥주를 조금씩 들이키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어버린 캔을 머리 위로 털고서 바닥으로 던진 후, 곧 삽시에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를 쓸어버리고서 그 위로 엎어졌다. 안주와 빈캔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며, 그 탓에 주춤 카라마츠가 뒤로 물러섰지만 아랑곳 않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에 거실 한켠이 울리도록 한숨을 깊게 내쉬던 카라마츠가 따라 테이블 근처로 바짝 허리를 숙이고서 얼굴을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졸려? 곧이어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에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그저 허공에 팔만 휘휘 젓자 어느새 덥썩 손을 잡아챈 카라마츠가 귓전에 바짝 입술을 대고서 작게 속삭였다. 잠들지 마. 간질이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떼며 잡힌 손목을 비틀자, 카라마츠의 행동이 일시적으로 잠시 멈춘 것을 느꼈다. 어째선지 느리게 고개를 틀자 저만치에 있을 법했던 카라마츠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꼭 눈을 감은 채로 달려든 그를 끝으로 눈을 뜨자 입술이 맞닿아 있음을 느꼈고, 그의 악력에 잠시 밀려 휘청거렸지만 등뒤로 바짝 붙는 힘에 어정한 자세로 매달려 있었다. 카라마츠에게서는 짙은 술내음이 풍겼다.
어지럽게 입안을 헤치고 다니는 탓에 기분이 아찔함을 넘어서 몽롱해지자, 다리 사이로 가까이 무릎을 끼워 넣은 카라마츠가 제 왼발로 테이블을 밀치고서 마치 네 발로 걷는 짐승마냥 다가와 귀 뒤를 손등으로 살짝 쓸어올렸다. 가끔씩 음주가 흥분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는지 카라마츠의 사소한 손짓 하나에도 안타깝게 나는 일일이 반응하고 있었으며, 본인도 숨이 차는 모양인지 이따금 입술을 떼어내며 짧게 숨을 들이쉬었고 그 탓에 가늘게 늘어지는 타액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오고가는 단 한 대화도 없이 민망할 정도로 한켠을 어지럽히는 사이 카라마츠가 대뜸 왼손을 들어 단추 사이로 밀어넣었고, 번뜩 딴 생각이 떠올라 어느새 올라탄 카라마츠의 다리 사이를 힘껏 가격하고서 다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카라마츠는 제 바지께를 두 손으로 쥐고서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
봄바람을 따라 배를 간질이는 느낌에 반쯤 감기던 눈을 뜨고서 주위를 살피자, 제 뒷자리에서 살이 타 가무잡잡한 팔이 책상 모서리 부근에 아슬하니 걸쳐져 있었다. 팔을 느리게 당기자 작은 미소를 지은 카라마츠가 책상 위로 엎어진 채 졸린 건지 눈을 몇 번씩을 끔벅였다. 졸리냐? 여전히 피식피식 웃고 있는 그의 코끝을 팔꿈치로 살짝씩 건드리며 묻자 고개짓 대신 짤막히 대답한 카라마츠가 다시끔 고개를 팔뚝 사이로 묻고서 다시끔 배를 간질였다.
‘손 잡아줘.’
‘…내가 왜?”
‘좋아하니까.’
하고는 일방적으로 손을 뻗어 덥썩 제 손을 잡고서 깍지를 끼고는, 만족한다는 듯 책상 아래로 슬며시 두 손을 내리었다. 누군가가 혹시나 볼까 겁을 먹고서 그의 손등을 때리며 잔뜩 화를 내었지만, 카라마츠는 아랑곳 않고 점차 뜬 눈의 크기를 줄이며 곧 얕은 숨을 내쉬는 채로 결국은 홀로 잠에 들었다. 어느새 느슨해지는 손아귀에 잽싸게 손을 풀고서 바지 주머니 속으로 숨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허공에 매달린 우스운 모양의 손을 슬며시 다시 붙잡고서 죄를 지은 사람마냥 수업 한동안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시끔 잡았던 그의 손은 역시나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서, 자칫하면 손을 잡는 행위에 오히려 내가 매달려 있을지도 몰랐다.
행동이 점차 멎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가가 인심을 쓰니, 눈물까지 찔금거리던 카라마츠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바닥을 어지럽히는 안주들과 빈 캔들, 그 중심에 위치한 자신과 카라마츠. 어째서 비굴해보이기 영락없는 그를 보니 괜히 웃음보가 터진 탓에, 결국은 홀로 배를 잡고서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영문 모를 웃음을 짓는 나의 앞에서 모호한 표정을 짓고있는 카라마츠에게 손을 뻗으며 겨우 폭소를 참았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보다 어떠한 원인으로 제게 손을 건네주는 것 따위가 더욱 의문인 듯 했다. 글쎄, 몇 개월만에 겨우 만나 밉기 짝이 없는 그에게 이런 사소한 행동들을 하며 즐거워하는 이유는 애초 카라마츠가 먼저 내게 시도했다, 라거나 술버릇은 어쩔 수 없으니까, 라는 모종의 변명이 될지도 모르는 것들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곧 내민 손을 잡고서 버릇처럼 손깍지를 끼는 그의 행동에 무심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술기운 때문만이 아니라, “그래도 여전히 좋아하니까.”라는 이유 때문일지도 몰랐다.